CCTV 확인부터 경찰서 합의까지
지난 금요일, 남편이 필리핀에서 처음으로 교통사고를 당했다.
2013년부터 필리핀에서 직접 운전했지만 사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날은 호우경보로 학교가 휴교했다. 딸아이와 친정엄마, 나는 그린벨트에서 점심을 먹고 쇼핑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비 때문에 그랩이 잘 잡히지 않을 것 같아 남편이 우리를 데리러 오기로 했다.
“사고가 났어.”
그 말만 남기고 전화가 끊겼다.
영어로 사고 상황을 설명하는 일이 남편에게 쉽지 않을 것 같아 근처에 있던 지인에게 먼저 현장으로 가 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나도 바로 그랩을 잡아 출발할 수 있었다.
사고는 우회전 중에 일어났다

사고 장소는 Neptune Street에서 Makati Avenue로 우회전하는 지점이었다.두 차량이 나란히 우회전하던 중 상대 차량이 우리 차 쪽으로 들어왔다. 남편은 경적을 울리고 차를 멈췄지만, 잠시 뒤 상대 차량이 우리 차와 충돌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상대 운전자는 수리비의 50%를 부담하겠다는 취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를, 언제, 어떻게 주겠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았다.구두로 애매하게 끝냈다가 나중에 말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경찰서에 가서 정식으로 사고 기록을 남기자고 했다.
사고 그림까지 그려야 했다
경찰서에 도착한 뒤 미리 정리한 영어 설명을 담당 경찰관에게 보여주었다. 경찰관은 사고 진술서 두 장을 주며 인적 사항과 사고 경위를 작성하라고 했다. 뒷면에는 사고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는 공간도 있었다. 우리는 그림을 세 장면으로 나누었다.
- 두 차량이 나란히 주행하던 모습
- 상대 차량이 우리 쪽으로 들어오는 모습
- 남편 차가 멈춘 뒤 충돌한 모습
그림 실력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차선과 차량 위치, 진행 방향이 보이도록 최대한 단순하게 그렸다. 경찰관은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설명했다.
- 정식으로 사건을 접수하는 방법 – File a case
- 당사자끼리 합의하는 방법 – Settlement
- 각자 자기 차량을 수리하는 방법 – fix own damage
경찰은 현장에서 어느 한쪽의 책임을 최종적으로 판단해 주지는 않았다. 대신 CCTV를 확인한 뒤 다시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CCTV에는 모든 장면이 찍혀 있었다
우리는 CCTV 확인 요청서를 들고 Bel-Air Barangay로 갔다. 그곳의 안내를 받아 사고 현장 근처 관제시설에서 영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시설이 꽤 체계적이었다. 대형 모니터에는 마카티 곳곳의 CCTV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사고 영상이 재생됐다. 상대 차량이 우리 차 쪽으로 들어오자 남편은 경적을 울리고 차를 멈췄다. 그리고 약 2초 뒤, 상대 차량이 우리 차와 충돌했다.
남편이 설명한 그대로였다.
영상 파일은 상사의 승인이 필요해 다음 날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사고 장면을 확인한 것만으로 상황은 훨씬 분명해졌다.
“각자 수리하면 안 될까요?”
CCTV를 함께 보고도 상대 운전자는 남편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 같다며 각자 차량을 수리하자고 했다. 나는 말했다.
“그렇게 끝낼 생각이었다면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쓰고 CCTV까지 확인하러 오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 부부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우리가 잘못했다면 인정하고 사과한다. 하지만 잘못하지 않은 일까지 무조건 참고 넘어가지는 않는다. 나는 큰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말했다.
상대 운전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찰서로 돌아오자 경찰관은 정식 사건으로 진행할 경우 추가 절차와 비용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정확한 명목까지 확인하지 못했다.
경찰관이 자리를 비운 뒤 나는 상대 운전자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어요?” 잠시 후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I’m sorry.” 그리고 자신에게는 정말 돈이 없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거의 60세에 가까워 보이는 남자가 우는 모습을 보자 남편도 마음이 약해진 것 같았다. 남편은 그를 달래며 울지 말라고 했다.
상대 운전자는 결국 우리 차를 보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돈 대신 사과를 받고 끝냈다
우리는 상대방의 사과를 받고 별도의 수리비를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경찰관은 합의 내용을 남기기 위해 Settlement Agreement – Vehicular Accident를 작성하라고 했다.
합의서에는 사고 날짜와 장소, 양측 운전자 정보, 상대방의 사과를 받았으며 추가 보상 없이 사건을 마무리한다는 내용을 적었다. 남편과 상대 운전자, 담당 경찰관이 각각 서명했다.
사고가 난 시간은 오후 4시 30분. 집에 도착하니 밤 9시 30분이었다.
아무도 저녁을 먹지 못했고, 남편은 불과 몇 시간 만에 급격히 늙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아침보다 수염도 훨씬 길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한 편의 드라마 같았던 우리의 첫 번째 교통사고가 끝났다.
이번 사고를 통해 배운 다섯 가지
1. 차량을 움직이기 전에 사진과 영상을 충분히 찍는다
파손 부위만 찍으면 부족하다. 두 차량의 전체 위치, 차선, 번호판, 신호등과 주변 건물까지 여러 방향에서 촬영하는 것이 좋다. 단, 부상자가 있거나 차량 이동이 위험한 사고라면 현장을 보존하고 경찰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2. 상대방의 정보를 확보한다
운전면허증, 차량 번호판, OR/CR, 연락처와 보험정보를 사진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다.
3. 주변 CCTV를 바로 찾는다
CCTV 영상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삭제될 수 있다. 주변 바랑가이, 건물 관리실, 상점 또는 관제시설에 최대한 빨리 문의해야 한다. 이번 사고에서도 CCTV가 가장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4. 구두 합의만 믿지 않는다
상대방이 수리비를 주겠다고 하더라도 금액, 지급 날짜와 방법을 반드시 문서로 남겨야 한다. 이해하지 못한 합의서에는 서명하지 않는 것이 좋다.
5. 블랙박스를 점검한다
모든 사고 현장에 CCTV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앞뒤를 촬영할 수 있는 블랙박스를 설치하고 정상적으로 녹화되는지 정기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이었다
마닐라에서 운전하다 보면 갑자기 차선을 넘어오는 차량, 도로 중간에 정차하는 지프니와 버스, 차량 사이로 끼어드는 오토바이를 자주 마주한다.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이번 사고를 통해 확실히 배운 것이 있다.
- 당황하더라도 감정부터 앞세우지 말 것.
- 현장 사진과 상대방 정보를 남길 것.
- 경찰 기록과 CCTV 같은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할 것.
- 그리고 끝까지 차분하게 확인하고 대화할 것.
차량 수리비를 받지는 못했지만, 다친 사람이 없었고 상대방의 사과를 받은 것으로 이번 사건을 마무리했다.
필리핀에서 운전하는 분들에게 우리의 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